내가 사는 곳의 장점 중 하나는 무료로 예술을 즐길 기회가 많다는 것. 국립 박물관과 미술관은 모두 무료 입장이고, NGA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가들을 초청해서 주말마다 무료 음악회도 연다. 그리고 의회도서관의 음악분과에서는 최정상급 레벨을 포함한 여러 아티스트를 초청해서 의회도서관 건물 내의 소규모 공연장에서 음악회를 시즌제로 올리는데 티켓 오픈하는 날 예매 경쟁이 있긴 하지만 알람 맞춰놓고 기다리다가 티켓 개시되는대로 클릭질만 잘 하면 한 사람 당 무료티켓을 최고 2장씩 겟할 수 있다. 광탈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전략을 잘 세워서 공략하면 100% 성공도 가능하다.


티켓 확보에 실패하더라도 무료 공연이라 no show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공연 시작 2시간 전에 가서 대기번호를 받고 기다리다가 공연시작 5분 전이 되면 빈자리에 앉을 수 있다. 대부분 클래식 음악 공연이지만 적어도 시즌당 2차례는 재단의 후원을 받아서 재즈 공연도 하고, 영화 상영도 하고 그렇다.


지난 시즌은 알람을 안 맞춰놓고 정신줄 놓고 있다가 30분 늦게 들어가서 티켓 구경도 못했지만 이번 시즌은 그간의 노하우를 총동원해 전략을 세운 덕에 원하던 공연 티켓을 모두 확보할 수 있었다. 뭐 전략이라고 하니까 거창하게 들리지만 그냥 인기 많을 것 같은 공연 순서대로 브라우저 창을 준비해놓고 하나씩 공략하는 거가 다임. 보통은 탑레벨 아티스트 공연이 역시 유명세 덕에 인기가 많고, 고음악이나 현대음악 레퍼토리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낮은 편.


프랑스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르노 카퓌송의 이번 공연 프로그램은 드뷔시와 라벨, 그리고 프랑크까지 프랑스 출신 작곡가 3인방의 바이올린 소나타.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는 적어도 수십 번 이상 들어서 익숙하지만 드뷔시와 라벨은 다소 생소해서 Tidal에서 부랴부랴 검색해서 벼락치기로 예습 땡기고 감.


드뷔시는 본인의 악기인 과르네리 파네트로 연주했는데, 아이작 스턴이 50년 동안 쓰던 악기라고 함. 중저음은 음색이 풍부하고 깊은 소리가 나는데 고음으로 가면 엄청 화려한 색채. Brilliant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그런 음색이었는데 화려하고 이목을 끌지만 경박스럽지 않다고 하면 대충 감이 오지 않을까 싶다. 특히 3악장 연주가 좋았음.


잠시 퇴장했다가 의회도서관에 소장되어있는 과르네리를 들고 입장. 의회도서관 음악분과 소장품 중에는 친필 악보 뿐만 아니라 악기도 있는데, 음악 잘 모르는 사람도 들어봤을 스트라디바리우스가 6점(바이올린 3대, 비올라 2대, 첼로 1대), 과르네리는 2점이 소장되어 있음. 특이한 점은 과르네리가 만든 바이올린 2대는 같은 나무를 사용해 만들었기 때문에 쌍둥이로 불리기도 함. 둘이 나란히 놓고 보면 나무결 패턴 등이 일치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중 처음 의회도서관에 들어온 건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작곡가인 크라이슬러(참고로 조슈아 벨의 크라이슬러 앨범 정말 좋다)가 사용하다가 기증한 "크라이슬러". 그리고 시몬 골드베르크가 연주하다 사후에 부인이 기증한 "비타 남작"이 이날 카퓌송이 연주한 악기. 


라벨의 곡은 제대로 들어본 게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재즈와 블루스 느낌을 녹여낸 2악장을 위트있게 연주한 점이 특히 좋았지만 아무래도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간간히 연주되는 악기라 그런지 몸이 덜 풀린 느낌이 있었는데, 특히 고음에서 피아니시모 조절이 연주자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파네트와 비교하면 음색이 좀 더 굵고 우는 소리가 난다고 해야 하나. 연주자의 기량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 같아 살짝 아쉬웠음.


후반부의 프로그램은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였는데, 이건 길 샤함의 1990년 DG 앨범으로 수십 번 들어서 너무나도 귀에 익숙한 곡. 너무 익숙한 나머지 연주자 사이의 해석의 간극 때문에 오히려 연주에 몰입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특히 1악장 템포를 대체적으로 느리게 가져가고 군데군데 루바토를 좀 과하다 싶게 남용해서 드라마틱해야 할 부분이 멜로드라마가 되어버린 느낌이 없잖았다. 활쓰기도 좀 달랐던 것 같은데 이건 바이올린 잘알못이라 확실하진 않음. 분명 내 기억에 4악장에서 길 샤함은 이 선율 라인을 한 활로 잇지 않고 한두 번 살짝 떼어서 더 극적으로 처리했던 거 같은데 카퓌송은 너무 레가토로 가서 몰아치는 맛이 부족하게 느껴졌음. 고음 피치가 좀 불안정하고 음색도 살짝 거칠었고, 특히 피아니시모 처리가 깔끔하지 않았던 걸 감안하면 확실하진 않지만 프랑크도 의회도서관 악기로 연주한 게 아닌가 싶다.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가 난이도가 높은가 싶기도 하고 (독일의 악보발행사인 Henle에서는 바이올린 곡의 난이도를 1부터 9까지 분류했는데 프랑크 소나타는 난이도 7인거 보면 역시 고난이도).


앵콜곡으로는 마스네의 명상곡을 연주했는데 레가토로 연주한 앞부분은 정말 최고였지만 역시 마지막의 피아니시모 지못미.


전체적으로 보면 좋았지만 살짝 2% 부족했던 연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지 블로거가 올린 공연후기도 있는데 이분은 과찬만 늘어놓으셨네. 그리고 과르네리 바이올린 이름도 잘못 알고 계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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